막 베하드 막 핀들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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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 베하드 막 핀들라크는 "생명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1040년 던컨 1세를 살해하고 알바의 왕이 되었다. 그는 머리 백작이었으며, 크누트 대왕에게 칭신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반란과 전쟁이 있었으며, 1057년 럼퍼넌 전투에서 맬컴 3세에게 패하여 사망했다. 막 베하드의 삶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소재가 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다양한 전설과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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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베하드 막 핀들라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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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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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 알바 왕국 |
통치 기간 | 1040년 8월 14일 – 1057년 8월 15일 |
이전 통치자 | 둔칸 1세 |
다음 통치자 | 룰라크 |
사망일 | 1057년 8월 15일 (51/52세) |
사망 장소 | 럼파난 |
배우자 | 그루오크 |
아버지 | 핀들라크 |
어머니 | 도나다 (추정) |
매장지 | 아이오나 |
가문 | 머리 가 |
정치 경력 | |
머리 백작 | 1032년–1057년 |
이전 | 길레 코엠간 |
다음 | 룰라크 |
이름 | |
추가 정보 | |
출생 | 1005년 |
출생지 | 딩월 |
별칭 | 적색왕 |
2. 이름
막 베하드(Mac Bethadmga, MacBheathagd)는 “생명의 아들”이라는 뜻이다.[30] 부칭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혈통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정의로운 사람”[30] 또는 “독실한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말로 해석된다.[31] 또다른 가설로는 “선출된 자들 중 하나”라는 뜻의 ''macc-bethad''mga였던 것이 오염된 결과라고도 한다.[30]
일부 문헌에서는 막 베하드를 말 콜룸 2세의 손자라고 하는데, 이 경우 막 베하드는 전임 왕인 돈카드 1세와는 사촌 관계가 된다. 또한 오크니 백작 토르핀 인 리키와도 사촌 관계가 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막 베하드가 토르핀과 사촌이 아니라 이복형제라고도 한다. 이는 말 콜룸 2세에게 딸이 세 명 있었는지, 두 명 있었는지(딸 한 명이 두 번 결혼한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인데, 그 딸의 수가 정확하지 않아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1]
막 베하드는 1032년에 모레이의 모르메르(백작)가 되었는데, 이전 모르메르인 길 코엠게인이 죽는 것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길 코엠게인의 미망인 그루오흐와 결혼했지만,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막 베하드는 길 코엠게인의 아들 룰라흐를 자신의 상속자로 받아들였다.
맥베스의 중세 아일랜드어(중세 게일어) 본명은 Macbethad mac Findláechmga였다. 이는 현대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MacBheatha mac Fhionnlaighgd로 표기되며, 현대 영어에서는 'Macbeth MacFinlay'(또는 'Finley', 'Findlay', 'Findley'로도 표기)로 표현된다. 'Mac Findláech'는 "핀들라크의 아들"을 의미하는 게일 부칭으로, 그의 아버지 모레이의 핀들라크를 가리킨다.
3. 혈통
4. 머리 백작
4. 1. 말 콜룸 2세와의 관계
1031년 크누트 대왕이 북쪽에서 내려와 말 콜룸 2세의 항복을 받자 막 베하드도 크누트에게 칭신하였다.[32] 이 사건을 두고 막 베하드의 권력이 머리 소왕(小王)으로서 알바 국왕 말 콜룸 2세와 대등했다는 주장과, 오히려 막 베하드가 말 콜룸 2세의 제후였다는 주장이 엇갈린다.[33] 어느 쪽이 진실이든, 1030년대 초에는 막 베하드가 말 콜룸 2세의 제후였다고 보는 것이 개연성이 높다. 말 콜룸 2세는 1034년 11월 25일 글라미스에서 사망했는데, 《베르칸의 예언》에 따르면 제 명에 죽지 못하고 시역자의 이름을 밝히지 못한 채 죽었다.[34]
4. 2. 던컨 1세와의 갈등
1034년 11월 25일 말 콜룸 2세가 글라미스에서 사망했다.[34] 《베르칸의 예언》에 따르면 그는 제 명에 죽지 못하고 "친족 살해"라는 말만 남긴 채 시역자의 이름은 밝히지 못하고 죽었다.[6][34] 티게르나크 연대기에는 "서유럽의 영광, 알바의 국왕, 키나드의 아들 말 콜룸이 죽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7][35]
말 콜룸 2세의 손자인 돈카드 막 크리난(훗날의 던컨 1세)가 1034년 11월 30일 알바 왕위를 주장했고, 여기에 이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6] 던컨 1세는 "타나세 리그(''tánaise ríg''gd)", 즉 대기 중인 왕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게일인 특유의 선거군주제인 타니스트리를 옹호하는 행동이었다.[8][36] 과거의 왕위 계승에서는 다양한 리그돔나(''rígdomna''gd), 즉 왕가의 남자들 사이의 분쟁이 벌어지곤 했다.[36]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늙은 던컨 왕과 달리 실제 역사상의 던컨 1세는 1034년 당시 젊은이였고, 1040년 죽었을 때도 젊었다.[9][37]
던컨 1세의 초기 치세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 《베르칸의 예언》에서 그를 “슬픔이 많은 사내”라고 묘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38] 1039년, 스트라흘르이가 노섬브리아에게 공격당했고, 던컨 1세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 잉글랜드 더럼을 공격했으나 재앙 수준의 참패로 끝났다. 던컨 1세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듬해 막 베하드의 영지인 머리로 군대를 몰고 갔는데, 아마 막 베하드에 대한 징벌적 원정이었던 것 같다.[10][38] 던컨 1세는 보흐나고완(오늘날의 엘긴 근교 피트개브니)이라는 곳에서 막 베하드가 이끄는 머리군에 의해 전사했다. 아마 1040년 8월 14일경으로 추측된다.[11][12][39][40]
5. 알바 국왕
1040년 8월 14일, 막 베하드는 사촌 던컨 1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13] 즉위 후 1043년에는 뱅코를, 1045년에는 던컨 1세의 아버지 덩켈드의 크리난을 제거했다.[41]
포르둔의 존에 따르면, 던컨 1세의 아내와 말 콜룸 3세(훗날 말 콜룸 막 돈카다)와 돔날 3세(훗날 돔날 막 돈카다)를 포함한 아이들은 노섬브리아나 오크니 등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E. 윌리엄 로버트슨은 아홀이 가장 안전한 장소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2]
마리아누스 스코투스는 1050년 막 베하드가 로마로 순례를 떠나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했다.[41] 막 베하드는 17년이라는 비교적 긴 기간 동안 재위하며 뛰어난 통치 능력을 보였다.[41]
5. 1. 크리난의 반란
1040년 8월 14일, 막 베하드는 사촌 던컨 1세를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했다.[13] 던컨 1세가 죽자 막 베하드가 알바 국왕이 되었는데, 즉위 당시에는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것 같지만, 그의 통치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13]1045년, 던컨 1세의 아버지인 덩켈드의 크리난(세습 아이오나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자 스코틀랜드 지파인 케넬 코나일의 후손)이 두 스코틀랜드 군대 간의 전투에서 사망했다.[13] 이 전투에서 던컨의 동생인 앨러데일의 맬드레드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족은 던컨 1세의 어린 아들 맬컴 3세를 옹호하기 위해 막 베하드와 싸웠다.[14]
포르둔의 존은 던컨의 아내가 미래의 왕들인 맬컴 3세(Máel Coluim mac Donnchada)와 도널드 3세(Domnall Bán mac Donnchada, 또는 도널베인)를 포함한 자녀들을 데리고 스코틀랜드를 떠났다고 적었다. 망명 장소로는 노섬브리아와 오크니 등 여러 곳이 제안되었으나, E. 윌리엄 로버트슨은 던컨의 미망인과 자녀들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그녀 또는 던컨의 친족 및 지지자들이 있는 애솔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15]
크리난이 패배한 후, 막 베하드는 분명히 도전을 받지 않았다. 마인츠의 마리아누스 스코투스는 1050년에 왕이 로마로 순례를 갔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씨앗처럼 돈을 주었다고 기록했다.
5. 2. 로마 순례
마리아누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1050년 막 베하드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으며,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씨앗을 뿌리듯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41] 이 순례는 막 베하드가 당시 스코틀랜드 내에서 확고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5. 3. 카를 훈다손과의 전쟁
《오크니 사람들의 사가》에 따르면, 카를 훈다손이라는 자가 "스코트인의 왕"을 칭하고 갈리브를 자기 것으로 요구하면서 오크니 백작 토르핀 시구르다르손과 전쟁을 벌였다. 카를 훈다손의 정체는 스코트어 문헌이나 게일어 문헌에 전혀 기록되지 않아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추측은 "훈다손"이 노르드어로 "개의 새끼"라는 뜻의 욕설이며, 훈다손의 정체는 막 베하드이고 그의 적들이 그를 "개새끼"라는 뜻으로 훈다손이라 불렀다는 것이다.[43]《오크니 사람들의 사가》에 기록된 전쟁의 결과를 보면, 토르핀은 오크니 메인랜드 동쪽 끝 디어네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카를 훈다손을 이겼다. 카를의 조카 무타탄(Mutatan) 또는 무단(Mudan)은 카흐네스의 제후로 봉해져 있었는데, 투르소에서 토르켈 포스트리에게 죽었다. 이후 타르바트 곶에서 벌어진 큰 전투에서[44] 카를 훈다손은 패배하여 도망치거나 죽었다. 그 후 토르핀은 남쪽으로 행군하여 파이프까지 닿으며 가는 길에 보이는 것은 모두 불태우고 약탈했다. 사가의 뒷부분에는 토르핀이 이렇게 스코틀랜드의 백국 아홉 개를 쓰러뜨렸다는 주장이 기록되어 있다.[45]
오르크네이가 사가는 토르핀 시구르드손과 칼 훈다손 사이의 분쟁이 칼 훈다손이 "스코틀랜드 왕"이 되어 케이스네스를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자료에는 언급되지 않는 칼 훈다손의 정체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이 문제가 확실히 해결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가장 일반적인 추정은 칼 훈다손이 그의 적들이 맥베스에게 붙인 모욕적인 별칭(고대 노르드어로 개자식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16] 윌리엄 포브스 스킨이 그를 스코틀랜드의 던컨 1세라고 주장한 것이 최근 몇 년 동안 다시 제기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건이 시적인 창작물이라는 아이디어가 제기되었다.[17]
칼 훈다손이 누구였든, 사가는 모레이 또는 로스의 스코틀랜드 통치자와의 지역 분쟁을 보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5. 4. 잉글랜드와의 전쟁
1052년, 막 베하드는 웨섹스 백작 고드윈과 참회왕 에드워드 사이의 잉글랜드 왕국 갈등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망명한 다수의 노르만인들을 자신의 궁정에 받아들였다. 1054년, 에드워드의 봉신인 노섬브리아 백작 시워드가 스코틀랜드에 대규모 침공을 가했다. 이 작전은 던시난 전투로 이어졌으며, [46]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인 3,000명과 잉글랜드인 1,500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시워드의 아들 중 한 명과 사위도 전사했다. 침공의 결과, "컴브리아 왕의 아들" 맬 콜룸(훗날 맬 콜룸 3세가 되는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통치자로 복위되었다.[46]5. 5. 말년과 최후
막 베하드는 1054년 잉글랜드의 침공을 이겨내지 못하고, 1057년 럼패넌에서 최후의 저항을 위해 카르나모운스 산 고개를 넘어 후퇴하던 중 모운스 구릉지 북쪽 사면에서 말 콜룸 막 돈카다(훗날 말 콜룸 3세)에게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48] 《베르칸의 예언》에 따르면, 막 베하드는 죽지 않고 부상만 입은 채 남쪽으로 6마일 떨어진 스쿤이라는 마을까지 가서 며칠 뒤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한다.[49] 정확한 사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Woolf는 8월 15일, Hudson은 8월 14일, Duncan은 포르둔의 존을 따라 12월 5일이라고 주장한다.[49]막 베하드의 의붓아들 룰라크가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말 콜룸 막 돈카다에게 폐위되고 살해당했다. 말 콜룸 막 돈카다는 말 콜룸 3세로 즉위했다.
후대에 쓰여진 글들과는 달리, 막 베하드가 살던 당대의 문헌들 중에는 그를 폭군이라고 쓴 문헌은 하나도 없다. 말 콜룸 3세 치세 시절에 쓰여진 《알바인의 노래》는 막 베하드를 “명망있는 막 베하드”라고 부르며, 《베르칸의 예언》에서는 “포르트루의 관대한 왕”이라고 칭송한다.[50]
6. 전설과 문학 작품
막 베하드의 삶은 던컨 1세와 마찬가지로 14세기 말에 이르러 전설로 굳어졌다. 존 오브 포든과 앤드루 오브 윈턴이 그들의 역사를 저술했으며, 헥토르 보이즈, 월터 바우어, 조지 뷰캐넌도 이러한 전설에 기여했다.
6. 1.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주로 라파엘 홀린셰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며, 아마도 1606년에 처음 공연되었다. 맥베스는 처음에는 노쇠한 왕 던컨에게 충성스러운 용감한 장군이었다. 세 마녀와 그의 아내 레이디 맥베스에게 조종당한 후, 맥베스는 던컨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결국, 마녀들의 예언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맥베스는 살인적인 폭군이 된다. 던컨의 아들 말콤은 맥베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죄책감에 시달린 레이디 맥베스는 자살한다. 전투 중에 맥베스는 맥베스의 명령으로 아내와 자녀들이 일찍이 살해당한 망명 귀족인 맥더프를 만난다. 맥베스는 맥더프와 결투를 벌이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처음에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맥더프가 맥베스가 항복하면 이전 신하들에게 조롱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하자, 맥베스는 "젊은 말콤의 발 앞에 땅에 키스하기 위해 굴복하지 않겠고, 섞인 무리의 저주에 놀아나지도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는 대신 맥더프와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선택한다. 맥더프는 맥베스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자르고, 연극은 말콤 왕자가 왕이 되면서 끝난다.[1]셰익스피어가 맥베스를 좋지 않게 묘사한 이유는 제임스 6세와 1세가 브루스 가문과 그의 스튜어트 가문을 통해 말콤 3세의 후손이었고, 맥베스의 가문은 그의 의붓아버지인 룰라흐가 죽은 지 6개월 만에 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제임스 왕은 또한 뱅코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역사가 피터 베레스포드 엘리스는 셰익스피어가 맥베스를 부정확하게 묘사한 것은 의도치 않은 것이라고 제안했는데, 그는 11세기 스코틀랜드와 문화적, 언어적으로 분리된 영국인과 '영국화된 스코틀랜드인'의 관점에서 쓰여진 자료에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리스는 "스코틀랜드의 맥베스가 살인적인 찬탈자로 타락한 것"은 셰익스피어보다 "맥베스가 럼파난에서 죽은 지 약 350년 후"였다고 제안했다.[1]
1959년 에세이에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캐릭터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와 비교했다. 파스테르나크는 두 캐릭터 모두 살인자로 시작하지 않지만, 일련의 잘못된 합리화와 자신이 법 위에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그렇게 된다고 설명했다.[1]
레이디 맥베스 역시 그 자체로 유명해졌다. 1865년 소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서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맥베스 비극''을 러시아 제국의 상인 계급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각색했다. 하지만 원작과는 달리 레스코프는 성 역할을 뒤바꿨다. 여성이 살인자이고 남성이 선동자이다. 레스코프의 소설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1936년 동명의 오페라의 토대가 되었다.[1]
6. 2. 기타 문학 작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맥베스는 처음에는 충성스러운 장군이었지만, 세 마녀와 레이디 맥베스의 꾐에 빠져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결국 마녀들의 예언에 속아 폭군이 되고, 맥더프와의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셰익스피어가 맥베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당시 왕 제임스 6세와 1세가 브루스 가와 스튜어트 가문을 통해 말콤 3세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1]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맥베스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비교하며, 두 인물 모두 처음에는 살인자가 아니었지만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고 분석했다.[3]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러시아 제국 상인 계급을 배경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뒤바꾸어 여성이 살인을 주도하고 남성이 선동하는 모습을 그렸다.[4] 이 소설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바탕이 되었다.[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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